[장주영 기자의 여책저책] 다리가 떨리기 전, 가슴이 떨리는 지금 떠나야 하는 이유를 뒤늦게 알고 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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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영 기자의 여책저책]
다리가 떨리기 전, 가슴이 떨리는 지금 떠나야 하는 이유를
뒤늦게 알고 한 선택
물론 짧은 여행도 좋습니다. 하지만 긴 머무름은 그만의 매력이 넘칩니다. 여행자가 아닌 생활자로 낯선 도시에 머물며 여러 시행착오부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자신에 대해 새롭게 배워가는 경험은 나이의 많고 적음과 상관 없이 울림을 전합니다.
책 ‘지금, 가장 젊은 날의 유럽여행’의 홍은주 작가는 자녀를 키워낸 뒤 유럽에서 26개월을 보내며 오늘이 앞으로 살아갈 날 중 가장 젊은 날이기에 지금 떠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몰타 / 사진 = 언스플래쉬
책 ‘신들의 물고기를 찾아서’의 황선도 작가는 환갑에 모든 직함을 내려놓고 몰타에서 1년을 지내며 은퇴는 독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두 책은 ‘인생의 중반 이후, 지금이 떠나야 할 때’라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합니다. 나이와 역할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용기 내어 나서자고 말이죠. 여책저책은 두 저자의 책을 통해 막연한 동경 대신 현실적인 용기를 건넵니다.
신들의 물고기를 찾아서
황선도 ㅣ 씨콤
남의 말을 편견 없이 이해할 수 있는 나이인 이순(耳順) 즉 환갑을 맞은 한 남자가 있다. 보통 은퇴 전후에 접어든 때라 웬만해선 대학교 기숙사를 찾아올 일이 없다. 그런데 한 남자가 기숙사 511호의 문을 열었다.
복도 끝 공용 주방에서는 손주뻘 학생들이 저마다 다른 나라 말로 웃고 떠들고 있다. 그가 양 어깨에 멘 배낭은 묵직하고, 머릿속은 이미 낯선 알파벳으로 가득하다. 평생 바다만 들여다보던 해양생태학자가 지중해의 작은 섬 몰타에서 맞은 첫 밤의 풍경이다.
책 ‘신들의 물고기를 찾아서’는 자타공인 물고기박사라 불리는 황선도가 은퇴 후 떠난 지중해 1년의 기록이다. 부제는 ‘몰타에서 온 은퇴유학 일기’다. 언뜻 부제만 보고 교수출신답게 공부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지만 책 속 ‘유학’은 머물러 배우는 유학(留學)이 아니라 길 위에서 보고 익히고 노는 유학(遊學)이다. 놀며 배우고, 배우며 노는 마음으로 떠난 지중해가 저자에게는 두 번째 학교가 됐다.
저자의 이력은 화려하다. 국립수산과학원과 한국수산자원공단을 거쳐 국립해양생물자원관 기관장까지 지냈다. ‘멸치 머리엔 블랙박스가 있다’ ‘우리가 사랑한 비린내’ 등 우리 바다의 생태를 입담 좋게 여러 권의 책으로 풀어냈다.
그런 그가 2022년 4월 모든 직함을 내려놓고 몰타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유는 담담했다. “이미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무엇을 해도 괜찮다.” 몰타는 지중해 한가운데 떠 있는 아직도 중세가 숨 쉬는 섬이다. 수도 발레타의 성벽과 옛 수도 임디나와 라바트의 고즈넉한 골목, 번화가 슬리에마, 요새 항구 쓰리시티즈 등이 대표적이다. 책은 관광 안내서(가이드북)이 다루지 않는 골목과 생활의 공간을 천천히 걷는다. 겉으로 드러난 풍경이 아닌 머무는 사람만이 아는 섬의 속살이다.
물론 낭만만 있지는 않다. 어학원 교실에 다시 앉아 낯선 언어와 씨름하고, 버스를 잘못 타 길을 잃고, 까다로운 학생비자 앞에서 한숨을 쉰다. ‘비자 받기가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라는 목차의 한 줄에서 그 진땀이 읽힌다. 하지만 저자는 거꾸로 가는 버스 안에서 깨닫는다. 정해진 경로를 벗어날 때 비로소 새로운 풍경이 보이고, 박사라는 직함 뒤에 숨어 있던 진짜 자신이 보인다는 것을 말이다.
이 책이 미덕으로 삼은 것은 솔직함이다. 식비, 교통비, 숙박비 같은 생활비를 유로화와 현지어로 나란히 적고 귀국 후 다시 정리해 담았다. 은퇴유학을 꿈꾸는 이에게 막연한 동경 대신 현실적으로 따져 볼 기준을 건네는 셈이다.
책의 한가운데에는 사람이 있다. 3부 제목부터 ‘사람이 답이다’다. 조지아에서 온 변호사 마리암, 일본에서 온 고등학생 레이나, 프랑스 청년 파비앙과 실바인, 열혈 아줌마 유학생 파티아 등 다국적 급우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레이나와는 무려 마흔 살 터울의 친구가 됐다. 호스트 패밀리 하숙집에서 밥을 나누고,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서툰 영어로 웃음을 터뜨린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은퇴의 의미를 다시 쓴다. 은퇴란 ‘가르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들으려는 마음’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해석한다. 나이와 국적, 직업의 벽은 지중해의 푸른 파도 앞에서 아무 힘도 쓰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꼰대’가 아닌 한 명의 친구로 거듭났다.
4부 ‘여행자의 시간’에서 책은 비로소 바다로 나선다. 몰타 최고의 해식동굴로 꼽히는 블루 그로토의 푸른 빛, 모래와 암반이 맞서는 멜리하 베이와 마르사스칼라, 척박한 땅에서 지켜낸 호수와 숲 등이 등장한다.
저자는 수산시장을 찾아 마르사실로크까지 달려가 몰타의 국민 생선 ‘람푸키’를 만난다. 물고기를 보는 일은 생태를 파악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바다를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를 읽는 일이다.
몰타를 벗어난 걸음은 이탈리아와 그리스로 이어진다. 로마제국의 심장부에서는 수천 년 된 석회암 건축물 앞에 서서 화석으로 과거를 읽듯 돌벽 사이의 문명을 탐색한다.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 물에 ‘갇힌’ 베네치아를 지나 신들의 도시 아테네의 아고라(고대 광장)에 닿는다.
그리고 꿈의 여행지 산토리니에 다다른다. 파란 지붕 너머 에게해를 바라보며 저자는 신화가 상상력으로 채운 바다를 과학자의 눈으로 다시 읽는다. 신화와 과학, 두 줄기 물살이 만나는 곳이 그의 여행지였다.
여정의 끝에서 책은 예상치 못한 반전을 꺼낸다. 신들의 물고기를 찾아 떠난 길의 종착지는 다름 아닌 우리 바다였다. 척박한 지중해를 보고 나서야 한반도 연근해의 풍요로움과 생물 다양성이 얼마나 귀한지 깨달았다는 것이다.
함께 본 기사: 필리핀 바탕가스 타알 역사와 함께하는 미식 투어
먼 곳을 돌아 가장 가까운 것의 가치를 발견하는 이야기, 그야말로 ‘파랑새’ 이야기다. 돌아와 보니 우리 바다에는 이미 ‘파랑돔’이라는 파랑새 같은 물고기가 있었다는 문장에서는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몰타 / 사진 = 언스플래쉬
500여 쪽의 두툼한 분량이지만 책장은 의외로 가볍게 넘어간다. 휴대전화에 담긴 수만 점의 사진을 정리하려던 짧은 글이 사유의 줄기로 번져 나간 덕분이다. 여행기와 에세이, 과학적 사유가 교차하는 문장들은 잘 숙성된 회처럼 쫀득하다.
책은 끝내 한 문장으로 모인다. “은퇴는 독립이다.” 누군가의 기준과 역할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리듬으로 배우고, 이동하고, 생각하는 삶이 곧 독립과 맞닿아 있다는 얘기다. 저자는 일관되게 ‘나가라, 낯선 곳에서 다시 배워라, 그곳에서 우리는 더 단단해진다’라는 메시지를 건넨다. 또 인생의 썰물이 시작된 줄 알았는데 지중해의 밀물이 밀려왔다고도 말한다.
책은 책장을 덮고 나면 어딘가 먼 바다에서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은퇴를 앞둔 이들에게는 용기 있는 시작을, 몰타가 궁금한 이들에게는 살아 본 사람의 생생한 기록을 건넨다.
지금, 가장 젊은 날의 유럽여행
홍은주 ㅣ 씽크스마트
호숫가 벤치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오후를 떠올려 본다. 물결은 느리게 일렁이고, 곁에 앉은 사람과는 두런두런 시시한 이야기를 나눈다. 시계를 볼 이유도, 다음 일정을 걱정할 이유도 없다. 책 ‘지금, 가장 젊은 날의 유럽여행’의 저자 홍은주가 유럽에서 가장 귀하게 배웠다는 시간이 바로 이런 오후다.
책은 질문 하나로 문을 연다. 당신의 가장 젊은 날은 언제인가. 저자의 답은 단호하면서도 다정하다. 바로 오늘이다.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오늘이 앞으로 살아갈 날 중 가장 젊은 날이기 때문에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가이드북이라면 으레 “어디를 가라”로 시작하겠지만, 이 책은 “왜 지금 떠나야 하는가”부터 묻는다.
저자는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을 먼저 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가 한계선이었다. 둥지가 비고 나서 빈둥지 증후군과 갱년기를 앓는 선배들을 보며 그는 마음속에 접어 둔 긴 여행을 꺼내 들었다. 해외살이 32년 가운데 유럽에서 보낸 26개월은 “나의 선택이었고 꿈같은 시간”이었다고 그는 밝혔다.
독일 뮌헨 / 사진 = 언스플래쉬
그 시간의 출발점은 독일 뮌헨이다. 2부 ‘어차피 인생이 여행이잖아’의 첫 장 제목인 ‘좌충우돌 뮌헨 정착기’에서 보듯 여행자가 아니라 생활자로 낯선 도시에 내려앉는 과정을 담았다. 독일 남부와 잘츠부르크, 이탈리아 베로나와 알프스 돌로미테, 신비를 품은 그리스 크레타 섬, 다양한 이동수단으로 달려가는 북유럽, 낯설지만 익숙한 요르단까지 길이 이어진다. 한 번의 휴가로는 닿기 어려운 폭과 깊이다.
돌로미테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장면이 인상적이다. 풍경을 소비하는 시선이 아니라 공간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글 전체에 깔려 있다. 여행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의 확장이라는 사실을 책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여 준다.
책 속에는 오래 곱씹게 되는 문장이 있다. 농담으로 다리가 떨릴 때 가지 말고 가슴이 떨릴 때 떠나라는 말이다. 자유여행은 귀찮고, 힘들고, 돈도 많이 든다는 선입견 앞에서 저자는 욕심내지 말고, 남이 간 여행을 따라 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충분하다며 어깨를 두드린다.
그 철학은 로마 편에서 구체적으로 풀어낸다. 아이들과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에서 저자는 시내 에어비엔비에 짐을 풀었다. 호텔보다 집처럼 여유로운 공간이 가족에게 알맞았기 때문이다. 영화 ‘로마의 휴일’ 속 스페인 광장을 걸으며 달콤한 젤라또를 입에 물고 로마를 누빈다. 그리고 과감하게 피렌체를 뺐다. 기차로 두 시간이면 닿는 데다 우피치 미술관의 명작이 즐비한 도시지만, 짧은 일정에 아이들이 지루해할 것을 염려한 선택이다.
여행은 더하는 일이 아니라 덜어 내는 일이라는 깨달음이 여기서 나온다. 사진을 배우는 저자의 선생님은 “욕심내지 말라(Don’t be greedy)”고 했다. 이것도 저것도 담으려는 카메라에는 어느 하나 제대로 담기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여행도 같다. 시간과 체력을 헤아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얻고 싶은 것을 정하라는 조언이 가이드북의 어떤 맛집 리스트보다 든든하게 와닿는다.
이 책이 마냥 감성에만 기대는 건 아니다. 3부 ‘스마트한 여행 전략’은 중요한 어플과 친해지는 법, 교통편, 숙소 예약과 숙소별 장단점, 예약이 필요한 장소와 활동, 여행의 기술을 차례로 정리했다. 1부에서는 중년에 떠나는 유럽 자유여행의 열 가지 이유를 풀어 놓고, 4부에서는 독자가 직접 나만의 여행 계획을 짜 보도록 이끈다. 읽고, 배우고, 마지막엔 손으로 써 보는 구성이다.
사진 왼쪽부터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요르단 암만 / 사진 = 언스플래쉬
저자는 현지 지식 가이드 투어를 활용하는 방법도 소개한다. 자유여행의 어려운 대목은 현지 가이드의 도움으로 덜고, 그 지역의 해박한 이야기는 덤으로 얻으라는 것이다. 모든 걸 혼자 해내야 자유여행인 것은 아니라는 조금은 의외이면서 참 현실적인 조언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많이 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같이 간 사람과의 관계라고 말한다. 의견이 조금 달라도, 식성이 달라도 서로 맞추면 힘든 여행도 즐거워진다는 것이다. 청심환을 챙겨 다니며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일화를 떠올리며, 유쾌하고 명랑한 동반자가 돼 보자고 권한다. 역할을 조금씩 나누고 서로를 이해한다면 유럽 자유여행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이 이어진다.
여행에서 돌아온 저자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강원도 영월 탄광촌 모운동, 운탄고도 2길 종점이자 3길 시작점에 복합문화공간 ‘유이당’이라는 작은 점 하나를 찍는 일이다. 여러 나라에서 겪은 경험을 담아 나와 가족을 넘어 더 큰 회복과 치유를 나누는 공간이다. 쉰에 독일에서 쉼을 얻었다면 예순에는 꿈을 나누고, 일흔에는 또 어떤 목표가 될지 기대된다는 문장에서 여행이 한 사람의 삶을 어디까지 데려가는지 엿보인다.
장주영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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