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책저책] 익숙하든 낯설든 상관없다…보다 느리게 깊게 걷다 보면 느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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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책저책] 익숙하든 낯설든 상관없다
…보다 느리게 깊게 걷다 보면 느끼는 것
현재의 삶이 힘들 때 우리는 여행을 떠올리고는 합니다. 하지만 여책저책이 만난 두 권의 책 속 저자는 여행을 도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아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하드보일드 트립’의 저자 김귀선은 번아웃 끝에 유라시아 대륙을 700일간 떠돌았고요. ‘라 돌체 비타’의 저자 김승우는 36년 직장 생활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향했습니다.
두 저자 모두 일상의 균열에서 출발해 낯선 길 위에서 외부의 풍경이 아닌 자기 내면을 바라봤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빠르게 소비하는 관광 대신 느리고 깊게 걸으며 얻은 것, 그것은 새로운 지식이 아닌 이미 내 안에 있던 삶의 지혜였습니다. 여책저책은 두 권의 책 속 저자를 통해 자신을 만나는 과정을 살펴봅니다.

하드보일드 트립
김귀선 | 호밀밭

여행 준비를 할 때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계획형과 즉흥형이 그것. mbti로 따지면 계획형은 J, 즉흥형은 p로 본다. 계획형은 출발하기 전에 대부분의 계획을 마친다. 반면 즉흥형은 실시간으로 결정을 내린다. 어느 성향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신 각 성향 별로 교과서급 여행자의 여행을 관전하다 보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 마디로 극P의 여행자가 있다. 익숙하든 낯설든 상관없이 오늘의 잠자리와 내일의 교통편 등 여정에 필요한 모든 것의 결정을 매일 내린다. 이렇다 보니 다음 국경은 어디일지,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할지 등이 매우 험난하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길은 험하고, 날씨는 요지경이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위험을 겪고 또 겪어도 그는 계속 간다.

책 ‘하드보일드 트립’의 저자 김귀선의 여행이 그렇다. 무심하고 불합리한 세계를 맨몸으로 통과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이해하려 애쓰는 먼지투성이 여행을 책으로 담아냈다. 차갑고도 단단하다는 뜻의 ‘하드보일드(Hard-boiled)’라는 수식어를 내걸고 700일간의 여행 이야기를 쌓았다.
자자는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부와 경희대학교 한약학과를 거쳐 다국적 제약회사에서 5년 간 근무하다 어느 날 이유 없는 눈물이 흐르는 자신을 마주했다. 번아웃이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인생이 시시하게 저물어갈지도 모른다는 공포마저 느꼈다. 저자는 결국 사표를 던지고 유라시아 대륙 횡단을 선택했다. 책은 그가 낯선 도시 사이를 유랑하며 매일 내려야 했던 수많은 결정과 그 과정에서 체득한 자기 신뢰의 근거를 담담하게 서술한다.

저자의 여정은 순탄과는 거리가 멀다. 바이칼 호수의 매서운 한기 속에서 전 재산이 든 지갑을 분실하고, 튀르키예의 들판에서는 굶주린 들개 무리의 공격을 받았다. 고속도로 한복판에 방치되는 공포 속에서도 저자는 흔들리는 자신을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위험과 불합리 앞에서 어떻게 버티고 통과했는지를 과장 없이 기록하며, ‘버틴다’는 행위가 세계와의 싸움이 아니라 결국 자기 안의 두려움과 마주하는 일이라고 역설한다.
괴팍한 시베리아 횡단 열차 승무원과의 오해를 풀어나가는 과정이나 히치하이킹을 하며 만난 낯선 이들의 호의는 타국에 대한 편견을 깨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투명하게 바라보게 하는 거울이 된다.

저자는 “여자 혼자 여행하는 것이 위험하지 않으냐”는 진부한 질문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곳은 누구에게나 위험하며, 이불 밖은 원래 위험하다”는 명쾌한 답변을 내놓는다. 위험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험을 다루는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길 위에서 배운 생존의 요령이자 삶을 직시하는 태도다. 인터라켄의 강가 벤치에서 배낭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하고, 빨간 스포츠카의 히치하이킹 행운에 기뻐하는 게 그의 여행이다.
책은 유라시아의 어느 화려한 도시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여행자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다. 그가 길바닥을 떠돌며 얻은 것은 새로운 지식이 아니다. 내 안에 이미 깃들어 있던 지혜를 알아보는 ‘눈’과 ‘마음’이다.

여행을 통해 삶을 벗어나려 했던 한 사람은 700일의 방랑 끝에 비로소 삶을 더 정확하게 살아내기 위한 단단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하드보일드 트립’은 여행의 기록을 넘어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는 자기 기준을 만들어가는 한 개인의 치열한 삶의 기록이다. 고단한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나 자신만의 변곡점이 필요한 이들에게 책은 씩씩한 용기 한 줌을 건넬 것이다.
라 돌체 비타: 피렌체, 토스카나
김승우 | 미다스북스

36년. 강산이 네 번 가량 바뀌는 시간을 한 자리에서 겪은 이가 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다양한 음악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우리가 익히 알만한 ‘열린 음악회’ ‘콘서트 7080’ 등이 그것. 어쩌면 그에게 음악은 인생의 가장 큰 부분 중 하나일 테다. 결국 그는 은퇴를 하면서 음악을 제대로 알고 싶었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고향 같은 곳이라 불리는 이탈리아로 한 달 살기를 떠났다. 정확히는 한 달 여행이다.
전직 KBS 음악 PD 김승우는 관성처럼 이어지던 36년간의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나는 누구인가, 나답게 사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맞닥뜨렸다. 그가 찾은 답은 본질로 들어가는 것. 예술가들의 영원한 안식처인 이탈리아 피렌체와 토스카나로 떠난 이유다.

이탈리아 피렌체 / 사진 = 언스플래쉬
그는 이탈리아의 길 위에서 느리고 깊게 걸으며 수확한 이야기를 책 ‘라 돌체 비타: 피렌체, 토스카나’로 엮었다. 책을 통해 그는 자신의 삶을 새롭게 재구성하고자 한 여행자로서의 고백을 담았다.
저자는 괴테와 멘델스존, 스탕달과 바그너 등 수많은 거장이 창작의 영감이 고갈될 때마다 이탈리아를 찾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마주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앞에서 그는 시간이 정지된 듯한 압도적인 전율을 경험했다.
돌 속에서 깨어나는 영혼을 목격한데 이어 그 순간이 어떻게 영원으로 이어지는지를 저자는 정치외교학 전공과 프랑스 사진학교 수학, 시각디자인학 석사 과정을 거친 독특한 이력을 토대로 깊이 있게 들여다 봤다.

이탈리아 피렌체 / 사진 = 언스플래쉬
르네상스의 예술적 인프라를 구축했던 메디치가의 흔적부터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이 던지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의 메시지까지, 저자의 문장은 단순한 감상을 넘어 인문학적 통찰로 나아간다.
여정은 꽃의 도시 피렌체를 지나 푸른빛이 감도는 토스카나의 구릉지로 이어진다. 키안티클라시코 와인의 향기가 흐르는 포도밭 길을 따라 걷고, 14세기 수도원이었던 시에나의 고풍스러운 식당에서 가랑비를 맞으며 즐기는 미식의 순간은 독자의 오감을 자극한다.
저자는 빠른 소비나 경쟁적인 관광 대신, 도시의 시간과 기억을 음미하는 느린 여행을 택한다. 캄포 광장에 몸을 뉘어 붉은 고딕 도시의 숨결을 느끼고, 몬탈치노의 와인에서 시간의 미학을 발견하는 과정은 퇴직 후의 공허함을 삶의 새로운 열정과 사랑으로 채워가는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 사진 = 언스플래쉬
책의 제목인 ‘라 돌체 비타(La Dolce Vita)’는 이탈리아어로 ‘달콤한 인생’을 의미한다. 저자가 발견한 달콤함은 화려한 성취가 아니라 노을에 물드는 미켈란젤로 광장의 저녁이나 낯선 골목에서 만난 온기 같은 소박한 조각들 속에 있다. 책은 일상의 쉼표가 필요한 이들에게 그리고 예술이 숨 쉬는 길 위에서 진정한 자신을 마주하고 싶은 이들에게 다정한 길잡이가 돼준다.
장주영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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