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주영 기자의 여책저책] 나이 쉰 넘겨 새로운 삶 위해 여행을 떠나면서 벌어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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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영 기자의 여책저책]
나이 쉰 넘겨 새로운 삶 위해 여행을 떠나면서 벌어진 일
사람마다 여행을 통해 얻는 것은 각기 다를 겁니다. 굳이 한 가지 공통점을 찾는다면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신경한 작가의 ‘50대 중반, 파리 와인 유학’은 인생의 전환점에서 새로운 배움에 도전하며 자신을 확장해 가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류학용 작가의 ‘아인슈페너 향을 따라 걷다’는 커피 한 잔과 골목길 풍경 속에서 도시의 문화와 사람, 그리고 일상의 행복을 발견하는 여행을 이야기합니다. 두 저자 모두 관광지를 둘러보는 여행을 넘어 낯선 공간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시선으로 삶을 채워가는 여정을 따뜻하게 전합니다.
50대 중반, 파리 와인유학
신경한 | 북크로스비
중년 이후의 나이에 유학을 떠난다고 하면 조금, 아니 많이 낯설다. 누군가는 인생의 절정을 보내는 시기일 테고, 자녀가 있는 이라면 더욱 여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더구나 의사라는 직업군에 속해 있다면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세상에는 놀라운 일이 참 많다. 이런 ‘만약의 경우’를 실행에 옮긴이가 있다. 내과 의사 신경한은 진료실을 잠시 떠나 와인을 배우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대부분 “왜 굳이?”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책 ‘50대 중반, 파리 와인유학’은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책장을 덮을 무렵에는 질문이 달라진다. ‘왜 떠났을까’가 아니라 ‘나도 아직 늦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으로 바뀐다.
저자 신경한은 서울대 의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내과 의사다. 제주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살아왔고,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안식년을 보내며 골프를 공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쉰을 훌쩍 넘긴 어느 날, 다시 학생이 되기로 결심한다. 목적지는 파리, 배움의 공간은 세계적인 요리학교 꼬르동블루의 와인 과정이었다.
책은 화려한 와인 입문서가 아니다. 프랑스 와인의 역사나 품종을 설명하는 전문서도 아니다. 오히려 낯선 도시에서 다시 학생이 된 한 사람의 기록에 가깝다. 익숙했던 의사의 명함을 잠시 내려놓고, 시험을 준비하고, 수업을 듣고, 실패를 겪으며 조금씩 성장하는 시간들이 잔잔하게 이어진다.
그래서 이 책의 주인공은 와인이 아니라 사람이다. 저자는 와인을 공부하면서 의사라는 자신의 직업을 자주 떠올린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환자의 병력을 듣고 진단하는 과정과 닮았고, 향을 구분하는 일은 작은 증상을 놓치지 않는 진료와 비슷하다. 서로 전혀 다른 분야처럼 보이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발효시킨 포도주스에 불과한 와인을 위대하게 만드는 건 역시 사람이다.” 책 속 문장은 그래서 오래 남는다. 와인의 맛보다 함께 마신 사람을 기억하게 되고, 유명한 빈티지보다 그 순간의 대화가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는 이야기는 여행의 본질과도 닮아 있다. 여행 역시 결국 장소보다 사람이 기억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그는 루브르를 걷고, 부르고뉴와 보르도의 포도밭을 찾아가고, 샹파뉴 지방에서 잔을 기울인다. 때로는 암스테르담과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트롬쇠까지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관광 명소를 나열하지 않는다. 어느 레스토랑이 훌륭했고, 어떤 골목이 아름다웠는지를 자랑하기보다 그곳에서 자신이 무엇을 배우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들려준다.
덕분에 독자는 파리를 소비하지 않고 함께 살아본다. 실용적인 정보도 곳곳에 담겼다.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미슐랭 빕 구르망 레스토랑, 현지 생활 팁, 와인을 배우며 알게 된 프랑스 식문화까지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가이드북의 역할도 하고, 이미 다녀온 사람에게는 여행의 여운을 다시 꺼내주는 기록이 된다.
저자가 삶을 대하는 태도도 인상적이다. 중년 이후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면 누구나 불안하다.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뒤처질까 걱정하고, 낯선 언어 앞에서 작아지기도 한다. 저자는 그런 순간을 숨기지 않는다. 시험을 앞두고 긴장하고, 슬럼프를 겪고, 자신감을 잃는 모습까지 솔직하게 적는다. 그래서 그의 도전은 특별한 성공담이 아니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성장기가 된다.
책의 핵심 소재인 와인을 다루는 얘기도 꽤 흥미롭다. 와인은 단순히 맛을 평가하는 술이 아니다. 기다림과 시간, 기후와 토양, 사람의 손길이 함께 만든 결과물이다. 사람 역시 그렇다. 살아온 시간과 경험이 쌓여 지금의 자신을 만든다는 점에서, 잘 익은 와인과 인생은 묘하게 닮아 있다.
책은 때문에 와인 이야기인 동시에 인생 이야기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시작을 미루는 데 익숙해진다. 지금도 괜찮으니 굳이 변화를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하지만 저자는 쉰을 넘긴 나이에 다시 학생이 됐고,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문화를 배우며 또 한 번 자신의 삶을 확장했다.
파리에서 저자가 배운 것은 와인의 향과 품종만이 아니었다. 익숙함을 내려놓는 용기, 다시 배우는 즐거움,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한 잔의 와인이 오래 숙성될수록 깊은 향을 품듯, 사람 역시 지나온 시간이 쌓일수록 더 단단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책은 천천히 들려준다.
아인슈페너 향을 따라 걷다
류학용 │ 미다스북스
같은 프랑스 파리를 여행해도 누구는 에펠탑만 보고 돌아오고, 누구는 루이 14세와 모네, 그리고 백년전쟁까지 함께 데리고 돌아온다. 여행의 차이는 결국 얼마나 많이 ‘알고 걷느냐’에 있다. 풍경은 누구에게나 같은 모습으로 펼쳐지지만, 그 풍경 속 이야기를 아는 순간 여행은 전혀 다른 깊이를 갖는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여행책은 새롭게 빛을 본다. 어디에서 사진을 찍으면 좋은지, 어느 식당이 맛있는지, 어떤 동선을 따라 움직이면 효율적인지 알려주는 책은 많다. 하지만 ‘왜 이 도시가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됐는지’를 이야기하는 여행서는 의외로 드물다.
류학용의 ‘아인슈페너 향을 따라 걷다’는 바로 그 빈자리를 채우는 책이다. 제목만 보면 유럽 카페를 거니는 감성 에세이처럼 보이지만, 책장을 펼치는 순간 독자는 역사와 문화, 예술과 철학이 함께 흐르는 유럽 인문 여행길에 들어선다.
저자는 삼성SDI 헝가리 법인과 프랑스 기업 생고방에서 20년 넘게 유럽인들과 함께 일하며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프랑스에서 오스트리아까지 14박 16일의 여정을 따라간다. 그러나 이 여행의 주인공은 관광지가 아니다. 여행지마다 켜켜이 쌓인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 공간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다.
파리에서는 ‘톨레랑스’가 왜 프랑스 사회의 정신이 됐는지 묻고, 노르망디에서는 모네의 그림이 탄생한 이유를 풍경 속에서 찾아낸다. 보르도에서는 와인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 와인이 어떻게 지역의 역사와 경제를 바꾸었는지를 들려준다. 니스에서는 주세페 가리발디를 만나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는 모차르트와 히틀러라는 서로 다른 두 이름이 한 도시 안에서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어려운 인문학을 강의처럼 설명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여행에 함께 나선 세 자매 가족이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을 통해 자연스럽게 질문하고 답한다. 덕분에 독자는 설명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여행 일행이 된 듯한 기분으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영화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의 장면도 흥미롭다. 영화 속 풍경이 실제 도시와 연결되고, 도시의 역사가 다시 영화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익숙했던 장소들이 새로운 의미를 얻는 순간이다.
책은 곳곳에 ‘눈감추(눈 감으면 떠오르는 추억)’라는 코너도 마련했다. 여행 중 오래 남는 장면을 짧게 기록한 메모들이다. 거창한 역사보다 골목에서 마신 커피 한 잔, 우연히 마주친 풍경 하나가 오래 기억되는 여행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각 장 끝의 질문 박스 역시 독자에게 “나라면 어떻게 생각할까”를 묻는다. 여행을 읽는 데서 끝내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장치다.
책을 읽다 보면 여행은 더 이상 ‘보는 일’이 아니라 ‘이해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베르사유 궁전은 화려한 건축물이 아니라 절대왕정의 상징이 되고, 세느강은 낭만의 배경을 넘어 프랑스 역사의 흐름으로 읽힌다. 돌로미티의 아름다운 절경도 그곳 사람들의 문화와 역사를 알고 나면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저자가 여행을 지식 자랑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사와 문화를 쉽게 풀어내면서도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알면 여행이 더 재미있어진다”는 단순한 믿음 하나로 차근차근 이야기를 이어간다. 덕분에 인문학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유럽을 여러 번 다녀온 사람이라면 책을 읽다 한번쯤 “그때 이 이야기를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낄 것이고, 아직 떠나지 못한 사람이라면 여행을 준비하는 설렘이 더욱 커질 것이다. 여행을 계획하지 않는 독자라도 책을 읽는 것만으로 파리에서 비엔나까지 함께 걸어가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결국 책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여행은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이해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익숙한 도시도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아는 순간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은 여행 안내서라기보다 유럽이라는 거대한 무대를 읽는 인문학 입문서에 가깝다.
커피 한 잔의 이름인 ‘아인슈페너’를 따라 시작한 여정은 어느새 유럽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을 이해하는 여행으로 이어진다. 책을 덮고 나면 다음 유럽 여행에서는 관광지보다 먼저 그 도시의 이야기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장주영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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