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주영 기자의 여책저책] 첫 눈에 반한 사랑이냐, 진득하게 우려낸 곰탕이냐…여행의 시선이 깊어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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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영 기자의 여책저책]
첫 눈에 반한 사랑이냐, 진득하게 우려낸 곰탕이냐
…여행의 시선이 깊어지는 방법
첫 눈에 반하는 사랑이 있죠. 반면 오래 끓여야 진국인 곰탕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정답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깊이에서 만큼은 곰탕이 우세합니다. 무릇 오래 바라볼수록 시선은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이학송 작가의 책 ‘역사를 새긴 나무, 수행을 품은 숲’은 사찰의 노거수를 따라 걸으며 나무에 쌓인 역사와 신앙,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읽어냅니다.
사진 = 언스플래쉬
지수일 작가의 책 ‘마추픽추의 시간을 걷는 사람’은 같은 장소를 800번 넘게 오르내리며 풍경 너머의 문명과 사람을 이해하게 된 과정을 담습니다.
두 저자 모두 빠르게 스쳐 가는 대신 한 대상을 오래 들여다볼 때 비로소 보이는 시간의 깊이를 이야기합니다.
역사를 새긴 나무, 수행을 품은 숲
이학송 ㅣ 보민출판사
사찰 마당에 들어서면 때로는 오래된 전각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있다. 얼만큼의 세월을 보냈는지 감조차 오지 않는 나무다. 굽은 가지를 넓게 펼친 은행나무,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드러낸 향나무, 수백 년을 한자리에서 견뎌온 느티나무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사람들은 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기도 하고 사진도 찍지만 그 나무가 하세월 무엇을 지켜봤는지까지 생각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생태교육가 이학송이 쓴 책 ‘역사를 새긴 나무, 수행을 품은 숲’은 그 익숙한 풍경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한다.
저자는 한국 사찰의 노거수를 따라 전국을 걷는다. 나무의 나이와 생김새를 살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역사와 신앙, 사람들의 삶을 함께 읽어낸다. 저자가 나무에 관심을 갖게 된 출발점은 학교숲이었다. 20여 년 동안 전국 초·중·고등학교의 숲을 조성하고 살피며 나무를 배웠다.
그러다 10여 년 전부터 사찰의 오래된 나무에 눈길을 돌렸다. 무심코 지나쳤던 노거수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감동이 일었다. 나무의 삶에 시대의 문화와 역사,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자는 미래를 위해 기록을 남기겠다는 마음으로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인천 강화 전등사 은행나무 및 단풍나무 / 사진 = 강화군
책에는 경기 군포 수리사의 고욤나무부터 경북 청도 운문사의 처진소나무, 충북 영동 반야사 배롱나무와 굴참나무, 인천 강화 전등사의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까지 다양한 노거수가 등장한다. 강원 양양 낙산사 홍련암의 관음송, 충북 보은 법주사의 정이품송도 만난다. 여섯 부로 나뉜 여정은 나무들이 견뎌온 시간과 화재의 흔적, 사찰림이 품은 수행의 의미, 자연과 신앙이 어우러진 문화경관을 두루 살핀다.
이 책에서 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다.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수행자이자 시대의 증인이다. 왕조가 바뀌고 전란과 화재가 지나가도 나무는 계절마다 잎을 틔우고 가지를 뻗는다. 사찰의 건물과 공간이 변하는 동안에도 같은 자리에서 사람들의 기도와 삶을 지켜본다. 사람은 떠나고 건물은 허물어질 수 있지만 살아남은 나무는 그곳에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명한다.
충북 영동 반야사 배롱나무 / 사진 = 충청북도
서울 조계사의 백송과 회화나무가 그렇다. 조계사의 역사는 100년이 채 되지 않지만 그 터에 뿌리내린 두 나무는 50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왔다. 저자는 이 나무들 덕분에 조계사가 근대 사찰을 넘어 더 깊은 역사와 문화의 공간으로 확장된다고 바라본다. 도심의 소음 속에서 묵묵히 서 있는 나무는 그곳을 지나간 사람과 사상, 시대의 흔적을 품는다.
나무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김제 망해사의 팽나무를 다룬 대목에서는 자연이 오랜 시간 만들어온 갯벌과 인간이 짧은 시간에 조성한 땅의 가치를 대비한다.
개발과 보존이라는 말로 간단히 정리하기 어려운 문제 앞에서 나무는 인간의 선택이 남긴 흔적까지 묵묵히 견뎌낸다. 저자는 화마의 상처를 입은 팽나무가 남은 생애만큼은 서해의 낙조를 온전히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나무를 보호한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된 생물을 보존하는 일을 넘어, 그 나무가 살아온 환경과 시간을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다.
경북 안동 광흥사 은행나무 / 사진 = 안동시
안동 광흥사의 은행나무 역시 자연과 공존하는 삶을 생각하게 한다. 저자는 한자리에서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기술이 나무의 생장과 환경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시대에도 중요한 것은 결국 나무를 대하는 태도다. 그래서 책 곳곳에 스며 있는 ‘어르신 나무’라는 표현에는 자연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 담겨 있다.
책은 사찰을 여행하는 방법도 새롭게 일러준다. 전각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불상 앞에서 기도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당의 나무를 바라보라고 권한다. 줄기의 굴곡과 가지의 방향, 뿌리가 내린 자리에는 저마다의 시간이 깃들어 있다. 나무를 오래 바라볼수록 사찰의 풍경은 깊어지고,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온 역사는 더 선명해진다.
책을 덮고 나면 사찰에서만 나무를 다르게 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길가의 가로수와 학교숲의 나무도 저마다의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로 다가온다. 풍경의 일부라고 여겼던 나무 한 그루가 누군가의 기억을 품고, 한 시대를 건너온 생명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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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목적지가 반드시 새로운 장소일 필요는 없다. 같은 곳을 찾더라도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발견한다면 여행은 달라진다. 사찰의 노거수 아래 잠시 멈춰 서는 일, 그늘을 내어준 나무의 시간을 헤아려보는 일도 그렇다.
이 책은 오래된 나무를 찾아가는 여정이면서 인간보다 오래 살아온 존재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돌아본다. 나무는 말이 없지만, 그 침묵 속에는 우리가 아직 다 읽지 못한 역사가 자라고 있다.
마추픽추의 시간을 걷는 사람
지수일 ㅣ 에고라이팅
800번. 그냥 앉아서 숫자 세기하는 것만으로 지친다. 그런데 무려 2400m가 넘는 페루의 마추픽추를 800번이 훨씬 넘게 오르고 내린 이가 있다. 횟수도 대단하지만 같은 곳을 1000번 가까이 다녔다는 것만으로 경의롭다. 여기에 하나 더. 단 한 번도 같은 풍경을 본 적이 없다는 그의 말에 더 놀랍다.
30여년 동안 페루에서 여행사 운영과 여행 가이드 일을 해 온 지수일 작가는 책 ‘마추픽추의 시간을 걷는 사람’을 통해 한 장소를 오래 바라본 사람의 느낌을 기록했다. 1995년 페루 리마에 처음 발을 디딘 저자는 잠시 머물다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페루는 어느새 삶의 터전이 됐고,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여행 가이드로 수많은 사람을 이끌며 안데스의 고원부터 아마존의 밀림, 태평양 연안의 사막까지 누볐다. 마추픽추를 수백 번 오르는 동안 그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졌다.
사진 = 언스플래쉬
안개가 걷히고 돌의 윤곽이 드러난다. 산과 구름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마추픽추는 수백 년의 시간을 견뎌온 고대 도시의 위용을 뽐낸다. 누군가에게는 평생 한 번 만나는 경이로운 풍경이지만 여행 가이드라는 직업을 선택한 저자는 달랐다. 그곳의 돌은 늘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빛을 받을 때마다 달랐고, 바람도 매번 불지만 매번 다른 방향에서 세기와 느낌이 달랐다. 그래서일까. 그곳에서 만나는 이들의 표정도 매번 달랐다.
이런 다름의 연속을 처음부터 느낀 것은 아니다. 마추픽추와의 첫 만남 때는 눈앞의 유적이 그저 경이로웠다. 시간이 흐르자 돌과 수로, 산과 태양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에는 유적을 만든 문명이 보였고, 더 오랜 시간이 지나자 풍경 너머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책은 한 여행자가 페루를 알아가는 과정이자 한 나라를 오래 바라본 끝에 인간을 이해하게 되는 여정이다.
책은 리마에서 시작해 페루의 식탁과 커피, 파라카스와 나스카의 사막, 쿠스코와 마추픽추의 돌길을 지나 아마존의 숲과 티티카카의 고원, 와라스의 설산으로 이어진다. 익숙한 여행지의 이름이지만 저자의 시선은 관광 안내서와 다르다. 명소의 위치와 특징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장소가 품은 역사와 문명,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사진 = 언스플래쉬
페루의 음식에서는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만들어낸 맛의 역사를 읽는다. 쿠스코의 돌벽에서는 문명과 문명이 겹쳐온 시간을 살핀다. 아마존에서는 울창한 숲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자연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겪은 상처를 함께 바라본다. 한 장소를 이해하려면 그곳의 풍경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마추픽추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인상적이다. 처음의 감동은 설명하기 어려운 충격에 가까웠지만 수백 번을 오가면서 경이로움은 관찰이 되고 관찰은 사유가 됐다. 저자는 마추픽추를 신비로운 전설 속 장소로만 보지 않는다. 산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낸 안데스 문명의 흔적이자 한 문명이 자연을 이해하고 살아가려 했던 방식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바라본다.
800번이라는 숫자는 특별한 기록이지만 이 책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 숫자에 담긴 시간이다. 같은 장소를 반복해서 찾는다고 해서 반드시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래 바라보고, 달라진 것을 발견하고,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의미를 읽어낼 때 비로소 장소는 새로운 얼굴을 드러낸다. 마추픽추가 매번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곳을 바라보는 사람이 달라진 것이다.
사진 = 언스플래쉬
30년 동안 수많은 여행자의 발걸음을 이끈 저자는 책에서 뜻밖의 고백을 한다. 자신이 사람들을 안내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오히려 자신을 안내한 것은 페루였다는 것이다. 가이드는 여행지의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한 나라에서 오래 살아가며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경험하다 보면 설명만으로는 전할 수 없는 것들이 보인다.
저자의 시선이 끝내 머무는 곳도 마추픽추의 돌이나 안데스의 설산만은 아니다. 고원의 아이들, 시장과 거리에서 만난 이웃들, 숲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길 위에서 함께했던 여행자들이다. 풍경은 여행의 출발점이지만 오래 남는 기억은 결국 사람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때문에 책에서 말하는 ‘느린 시간’은 단순히 천천히 걷거나 오래 머무는 여행법을 뜻하지 않는다. 첫인상만으로 장소를 판단하지 않고 눈앞의 풍경 뒤에 쌓인 역사를 살피며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이해하려는 태도에 가깝다. 한 번 방문한 곳을 안다고 쉽게 말하지 않는 것 나아가 낯선 세계를 오래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까지 돌아보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여행이다.
사진 = 언스플래쉬
저자는 페루를 반드시 가봐야 할 나라가 아니라 다시 가봐야 할 나라라고 말한다. 한 번의 만남으로는 그 얼굴을 다 알 수 없고, 한 번의 대화로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풍경을 만나고, 다시 찾으면 사람을 만나며, 더 오래 머물면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여행은 어디론가 떠났다가 돌아오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같은 길을 다시 걸으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타인의 삶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넓히는 과정이다. 30년 동안 페루를 안내해온 저자가 독자에게 건네는 것도 새로운 여행 코스가 아니다. 한 장소를 오래 사랑하고 바라보는 법,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사람을 이해하는 법이다.
장주영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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