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책저책] 그 길을 걷고서야 깨달았다…길과 공간의 진짜 의미
산악인 엄홍길은 “길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나를 비우는 스승”이라고 말했습니다. 대개 목적지를 정하고 정해진 기준 안에서 목표를 달성하려 하죠. 셀 수 없이 산을 올랐던 엄홍길은 아마도 이들의 맹목적인 여행법이 틀렸다고 말하는 듯 합니다. 여정은 결국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 그 비운 곳에 삶의 의미를 묻고 담는 과정일테니 말이죠.
차마고도 / 사진 = 더봄출판
길과 관련한 두 책이 있습니다. 대전을 배경으로 한 도시 안내서 ‘감필라고로 가는 100가지 방법’과 고산 교역로를 탐색한 ‘차마고도-길 위의 존재 수업’입니다. 두 책은 서로 다른 공간을 다루지만 ‘길’을 통해 도시와 인간을 새롭게 바라본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한 권은 대전 곳곳의 미션을 따라 도시의 숨은 매력을 발견하게 하고요. 다른 한 권은 차마고도를 걸으며 인간 존재와 문명의 의미를 성찰합니다. 여책저책은 걷고 경험하는 과정 속에서 삶과 공간을 다시 이해하도록 이끄는 두 책을 만납니다.
감필라고로 가는 100가지 방법
글 장영웅·박수연·심정원·한소영, 그림 세아추 | 노네임프레스
대놓고 ‘노잼’, 그러니까 재미없다고 하는데도 “괜찮아유”로 대꾸하는 사람들이 있는 도시. 대전이다. ‘노잼도시’라는 별명이 분명 기분 나쁠 수 있지만 대전에 사는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실제 대전을 잘 몰라서라는 이유에서다. 물론 성심당, 빵, 칼국수 등을 꼽으려는 것 또한 아니다. 대전만이 전하는 충분한 매력이 있다고 장영웅·박수연·심정원·한소영 등 책을 기획한 노네임프레스 집필진은 말한다.
대전의 숨겨진 매력을 유쾌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책이 세상에 나왔다. 제목이 독특하다. ‘감필라고로 가는 100가지 방법’이다. 이 책은 1993년 대전엑스포의 마스코트였던 꿈돌이 세계관을 바탕으로, 대전을 새롭게 바라보는 독특한 형식의 도시 입문서다.
책의 출발점은 꿈돌이의 고향 행성 ‘감필라고’다. 이 행성은 1993년 대전엑스포 당시 만들어진 꿈돌이 세계관 속 설정이다. 백조자리 부근에 있는 별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야기 속에서 꿈돌이는 아기 외계인으로 태어나 대전엑스포 개최를 돕기 위해 지구로 파견된다. 이후 30여 년이 흐른 현재, 그는 가족과 함께 대전에 정착해 살아가는 ‘꿈씨패밀리’의 가장으로 거듭난다.
이야기는 꿈씨패밀리의 아이들이 자신의 고향 행성에 대한 궁금증을 품으면서 시작한다. 사람들과 조금 다른 모습의 자신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감필라고’로 가고 싶다며 부모에게 조른다. 이에 꿈돌이와 꿈순이는 아이들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대전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100가지 미션을 모두 수행하면 감필라고 원정대가 될 자격을 주겠다는 것이다.
책은 바로 이 ‘100가지 미션’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각 미션은 대전의 다양한 장소와 풍경을 경험하도록 안내한다. 잘 알려진 관광 명소뿐 아니라 도시 곳곳에 숨어 있는 작은 장면과 일상적인 공간도 소개한다. 이를 통해 독자는 단순한 관광 코스가 아닌, 도시의 생활과 분위기를 체험하는 방식으로 대전을 이해하게 된다.
특히 이 책은 기존 관광 안내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도시를 풀어낸다. 일반적인 여행 가이드가 명소와 정보를 나열하는 데 집중했다면, ‘감필라고로 가는 100가지 방법’은 스토리와 캐릭터를 통해 도시를 체험하도록 만든다. 꿈돌이와 꿈순이, 그리고 여러 자녀로 이루어진 ‘꿈씨패밀리’가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전의 다양한 장소와 문화가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귀엽고 재치 있는 일러스트 역시 이 책의 중요한 요소다. 일러스트 작가 세아추는 캐릭터와 도시 풍경을 친근하고 유머러스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일러스트와 스토리를 결합한 구성은 어린 독자부터 성인 독자까지 폭넓게 즐길 수 있는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책에는 100개의 미션 외에도 캐릭터 소개와 인덱스 등도 수록했다. 독자는 원하는 미션을 골라 대전을 직접 체험할 수도 있고, 책을 따라 하나씩 수행하며 도시를 탐험하는 방식으로 읽을 수도 있다.
책은 대전을 처음 찾는 여행자에게는 새로운 탐험 지도가 되고, 오래 살던 사람에게는 익숙한 도시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될 재미를 전한다. 꿈돌이와 꿈씨패밀리가 제안하는 100가지 미션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대전이라는 도시가 조금 더 흥미롭고 다정한 공간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차마고도-길 위의 존재 수업
류현미 | 더봄출판
설산과 협곡을 넘어 이어지는 오래된 길 위에서 인간은 무엇을 배울까. 인류의 고산 교역로인 차마고도(茶馬古道)를 직접 걸으며 인간 존재와 문명의 의미를 탐색한 책이 출간했다. 제목은 ‘차마고도-길 위의 존재 수업’.
류현미 (사)식문화세계교류협회 회장이 집필한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나 역사서가 아니다. 저자는 차와 말을 교환하던 고대 교역로인 차마고도를 걸으며 인간의 삶과 문명의 본질을 다시 묻는 ‘존재 철학의 기록’을 펼쳐 보인다.
차마고도는 중국 윈난과 쓰촨, 티베트 고원을 잇는 고산 교역로로, 수천 년 동안 차와 말이 오가며 문명의 교류가 이어졌던 길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길의 의미를 단순한 교역로 이상의 것으로 바라본다. 물자 이동의 통로가 아니라 생존과 신앙, 관계와 문화가 흐르던 ‘문명의 첫 언어’라는 시선이다.
저자는 해발 3000m에서 5000m에 이르는 차마고도의 길을 직접 걸으며 길이 인간에게 건네는 오래된 질문을 기록했다. 책은 풍경을 묘사하는 여행기보다 길 앞에서 멈춰 선 인간의 태도와 침묵에 주목한다. 설산과 강, 마방의 발자국, 티베트 사원과 장터를 지나며 저자는 인간이 어떻게 서로의 결핍을 나누며 문명을 이루어 왔는지를 조용히 되짚는다.
책은 ‘기원·지형·생존·경계’ 등 네 가지로 구성한다. 차마고도의 역사와 지리, 마방의 삶과 티베트 문화, 차와 종교가 교차하는 공간을 따라가며 인간 존재의 근원을 사유한다. 특히 샹그릴라의 기도와 식탁, 티베트 사원의 명상과 장터의 풍경 등은 문명이 속도보다 관계와 호흡 속에서 이어져 왔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길을 통해 인간이 문명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차와 말이 만나 교역과 문화가 형성되었듯, 인간 역시 서로의 부족함을 나누며 성장해 왔다는 것이다. 차마고도는 그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길이라는 설명이다.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현대 사회와도 맞닿아 있다. 저자는 특히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기술이 지식과 노동을 대신하는 시대에 인간다움의 의미를 다시 질문한다. 기술이 정보를 빠르게 전달하는 시대일수록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길의 의미’와 ‘느린 걸음 속에서 들리는 존재의 숨결’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여정은 개인적 고통에서 시작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삶의 기반이 흔들리며 겪은 신체적·정신적 고통 속에서 산을 오르며 몸의 리듬을 회복했고, 이후 킬리만자로와 히말라야, 몽골과 대만의 산을 지나 차마고도에 이르렀다. 저자에게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저자는 “길은 인간이 남긴 가장 오래된 언어”라고 말한다. 인간이 땅 위에 남긴 첫 발자국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존재의 기록이었고, 서로 다른 생명이 서로에게 다가가기 시작한 최초의 문장이었다는 것이다.
‘차마고도-길 위의 존재 수업’은 빠른 답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대신 독자에게 오래 남는 질문을 건넨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길 위에 서 있는가. 그리고 그 길은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오래된 길을 따라 이어지는 이 질문은 결국 독자의 삶으로 되돌아온다. 저자가 말하듯 길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순례이기 때문이다.
장주영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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